고대의 노예제 사회의 모습 노예제의 폐해
고대 노예제사회는 그 형태가 여러가지이나 지역에 따라서 상당히 차이가 있는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대규모적인 치수관개공사의 필요와 수전농업의 특성 때문에 개별 경영의 단위인 가족의 자립성이 약했다.
공동체에 의한 공동 노동의 전통이 강하게 유지된 채로 노예제의 단계로 들어선 고대 아시아 사회에서는 공동체 전체가 강대한 전제군주 아래에 예속되어 공납 및 사역이라는 형태로 그 잉여노동을 착취당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개인이 부유한 가부장에게 직접 소유당하는 순수한 노예도 존재했지만, 그것은 수자도 많지 않았고 주로 가내 노예로서 사용되었으며 소수의 군주와 귀족의 손에 집중적으로 소유도ㅚ는데 머무르고 있었다.
이것에 대하여 공동체의 공유지를 보유하면서도 그것과 함께 가족단위의 개별경영이 충분히 진전된 단계에서 노예제로 이행한 그리스 로마의 고대사회가 있다. 여기에서는 공동체가 일찍이 그 공유지를 사유지화한 대토지 소유 귀족과 농업,수공업에 종사하는 자유민 근로자(평민)중 소수의 가내노예를 가진 자도 있고, 가지지 못한 자도 있었다.
그 밑에 주로 피정복자 출신인 수많은 노예가 놓여 있었다. 이 노예는 광산의 채굴 및 수공업 농업에 노동노예로써 투입되었다. 그리스 로마의 고대사회는 이러한 형태로 발전된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의 광산 노예 이미지를 떠올려 보면, 노동 노예는 말을 하는 도구로 쇠사슬에 묶여서 채찍으로 내몰렸고 그 착취는 참혹했다.
그들은 잉여노동은 물론 필요노동의 일부조차도 착취당했기 때문에 사망율도 높았다. 따라서 끊인없이 새로운 노예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를 위한 끊임없는 노예전쟁이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는 행해졌다.
그리스 로마의 노동 노예제 생산관계는 사회의 생산력을 크게 높였고, 그로 인하여 상업의 발전으로 도시가 번성하였고 따라서 고대 문명의 꽃이 피게 된다. 그로는 반대로 노예제 아래에서의 생산력 발전은 드디어 정체되었고 질식되어 갔다. 주 원인은 생산력의 중요한 요소인 노예자산이 놓여 있었던 객관적인 존재, 그것 속에 있었다. 즉 노예는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존재였으며 소와 말과 같이 아니 그 이상으로 혹사당하여 잉여너동을 착취당하였다. 생사여부마저도 노예주에게 속해있었다.
노예제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노예 소유자들은 노동을 천한 노예적인 것으로 여기고 노동으로부터 멀어져 갔으며, 생산기술에 대한 관심은 사회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노동수단과 생산기술의 진보는 정체되거나 혹은 퇴보되기조차 하였다. 호화스러운 대토지 소유자의 비생산적인 사회생활은 단지 엄청난 인력과 낭비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된 노예획득 전쟁에 의해서 노예국가의 지배권이 팽창하여 가면 갈수록 간신히 지배권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어서 새로운 노예의 공급은 점차로 곤란하게 되고, 노예들의 끊임없는 도주 내지 봉기와 더불어서, 드디어 노예제 경제의 기초 그것이 동요되게 된 것이다. 상업도 쇠퇴하여 갔고 그와같이 도시도 쇠퇴하여 갔다.